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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
Date : 2013-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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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는 1492년 8월 3일 스페인을 출발해서 카나리제도 방향으로 항로를 잡고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대서양을 지나 인도로 갈 수 있다고 믿었으며,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는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당시 유럽사람들에게 중국과 인도에서 생산되는 비단과 향료는 매우 큰 인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품들은 대부분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있던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해야 했기에 엄청나게 비쌀 수 밖에 없었습니다. 콜럼버스는 낙타 대신에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면 인도와 중국에 빠르게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실제로 1492년 10월 12일 바하마제도의 한 섬에 도착하여 산살바도르(San Salvador: 성스러운 구세주)라는 이름을 붙일 때까지도 콜럼버스는 그 곳을 인도의 서쪽 지역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신대륙은 콜럼버스가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캐나다와 미국 지역,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는 이미 몇 천년 전부터 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 500백년 전에 이미 북유럽의 바이킹들이 캐나다 해변까지 탐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콜럼버스의 업적은 신대륙의 발견이 아닌 신세계를 유럽인들에게 소개한 것입니다. 오백 년 전에 왔다 간 바이킹들은 그저 방문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유럽인들에게 신세계를 알리지 못한 체 방문했던 기억을 잊어버렸습니다. 즉, 콜럼버스의 신대륙 탐험이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식민지와 거주지로서의 아메리카 대륙을 알리는 시작이 되었고, 이를 통해서 오늘날 세계의 중심 국가인 미국이 탄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위인으로 추앙하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콜럼버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지만, 1451년 이탈리아 남서 해안의 항구 도시인 제노바에서 태어난 것은 확실합니다. 15세기 제노바는 조선업으로 유명했고, 이곳에서 자란 콜럼버스는 자연스럽게 바다를 보면서 해상무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당대 이탈리아 상인들과 동방의 상인들의 거래가 이곳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기에 동양의 진귀한 물품들을 거래하는 것이 큰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장성한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지도 제작자로 명성을 날렸으며, 항로와 육로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쌓게 됩니다. 그 후 독학으로 에스파냐어를 공부했고, 본격적으로 선박을 조종하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27살이 되던 해인 1478년 부유한 포르투갈 관리의 딸과 결혼하며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되었지만, 검은 바다 대서양을 건너 황금과 보물이 넘쳐나는 동양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겠다는 야망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에스파냐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으로 동방으로 가는 서쪽 항로 개척을 위한 모험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가 1492년 8월이며, 산타마리아호, 핀타호, 니나호 등 3척의 배에 120명의 선원들이 목숨을 건 동방항로 개척에 나섰습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먼 바다로 향하는 항해는 매우 험난했습니다. 오랜 바다 생활에 지친 선원들이 폭동을 일으킬 위험이 있었고, 낮은 구름을 육지로 착각하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몇 일이면 육지에 도착한다는 콜럼버스의 말과는 달리 육지가 보이지 않자 선원들은 더욱 거칠어졌습니다. 10월 달이 되자 에스파냐로 돌아가자는 선원들이 생겼고, 콜럼버스는 육지가 보이지 않으면 머리를 잘라도 좋다는 약속을 하며 항해를 독려했습니다. 1492년 10월 12일 새벽에 드디어 육지가 보였습니다. 콜럼버스는 그 섬에 산살바도르(San Salvador:성스러운 구세주)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절망의 순간에서 항해를 성공하게 해준 구세주 같은 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산토도밍고와 쿠바를 차례로 발견했습니다. 오랜 시간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던 아메리카 대륙이 역사의 무대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1차 항해를 통해서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이 피우던 담배와 해먹을 발견합니다. 이를 통해서 유럽에 담배가 처음으로 소개되었고, 선원들은 흔들이 침대로 해먹을 애용하게 됩니다. 콜럼버스는 의기양양하게 에스파냐로 돌아왔습니다. 비록 금은보화는 없었지만 진귀한 물건들과 인디오 원주민을 거느린 콜럼버스는 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으로부터 영웅대접을 받았습니다. 이에 고무된 콜럼버스의 두 번째 항해는 17척의 선박과 1200명의 선원들이 함께 했습니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말과 달리 신대륙에는 금은보화와 같이 값비싼 보물이 없었습니다. 신대륙을 식민지로 인식했던 콜럼버스와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을 사냥하여 노예로 팔아 넘겼습니다. 또한 14세 이상의 원주민 남자들에게는 석 달에 한 번씩 금을 바치게 했습니다. 그리고 유럽의 질병인 천연두에 전염되어 50년 동안 수십만 명에 달하는 원주민들이 사망하게 됩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개발은 유럽인들에게 축복과 같은 일대 사건이었지만, 아메리카 대륙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던 인디언과 원주민들에게는 지옥 같은 식민지 시대를 시작하는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콜럼버스는 4회에 걸쳐서 항해를 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항해부터 몰락을 시작했고, 에스파냐의 왕과 왕비는 콜럼버스를 멀리했습니다. 콜럼버스가 약속했던 금은보화와 향료는 없었고, 인도항로 개척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1502년 5월 4척의 작은 배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한 콜럼버스는 별다른 소득 없이 2년만에 에스파냐로 돌아왔고, 더 이상 왕실의 후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를 후원했던 이사벨 여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콜럼버스는 좌절감과 관절염에 시달리다가 1506년 5월 21일 55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1542년 그를 추앙하는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서인도제도의 히스파니올라섬 산토 도밍고 대성당으로 옮겨서 묻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지금의 중남미인 카리브 해 연안의 산살바도르에 처음으로 도착한 후 그 곳을 인도라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일대를 서인도 제도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곳의 원주민들을 인도인으로 생각했고, 인디언(인도인)이라고 유럽에 알렸습니다. 원래 아메리카 대륙에 거주하고 있던 원주민들은 그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인도 사람이라는 의미인 인디언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국제적으로 아메리카 원주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서양세계에 있어서 콜럼버스는 위대한 탐험가이자 위인이지만 원주민들의 입장에서는 기분 나쁜 이방인일 뿐입니다. 현재도 10월 12일을 콜럼버스의 날(아메리카 발견일)로 정한 것에 수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반발하고 있습니다.
 
 
 
콜럼버스는 40명의 선원과 함께 산타마리아호에 승선하여 피타호와 니냐호 2척을 거느리고 첫 번째 항해에 나섰습니다. 산타마리아호는 길이 23m, 너비 7.5m이며 150톤의 적재능력을 지닌 카라크선 이었습니다. 총 3개의 돛대에 5장의 돛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콜럼버스가 처음으로 산살바도르에 상륙할 때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처음으로 육지를 발견한 것은 산타마리아호가 아닌 니냐호에 탑승하고 있던 선원이라고 합니다. 산타마리아호는 같은 해 크리스마스 때 서인도의 히스파니올라 근해에서 좌초했으며 콜럼버스는 니냐호를 타고 귀국했습니다. 산타마리아호의 원형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당시의 자료와 선박구조를 추정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서 비슷한 형태로 복원하여 전해지고 있습니다.
 

뜯어만드는세상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는 조립하는 재미와 완성도가 뛰어납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승선했던 산타마리아호를 똑같이 재현한 작품에 직접 도전해 보세요!

 

범선의 멋진 모습

 

조립하는 재미가 듬뿍

 

특유의 십자가 문양의 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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